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를 읽고
스캇 솔츠 목사님의 책에는 따뜻한 감동이 있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격려가 있으며, 나도 할 수 있으니 해보라 하는 도전이 있다. 스캇 목사님이 쓴 두권의 책 리더의 눈물, 선에 갖힌 인간 선 밖의 예수를 읽고서 자연스럽게 세번째 책 '세상이 기다리는 기독교'를 읽게 되었다.
책의 큰 주제는 세가지다.
1장. 세상은 '본래의 기독교'를 원한다.
2장. 세상이 기대하는 '바로 그 공동체'가 되려면
3장. 예수로 옷 입고 '우리를 기다리는 세상 속으로'
1장에서 스캇 목사님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에 달린 것임을 분명히 한다. 기억에 남는 표현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만큼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만큼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100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행동으로의 부르심이 우선이 아니라 상함과 통회로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나 오렌지 나무처럼 영적 열매는 계절에 따라 자란다. 쉬는 계절에는 잎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지 않아 마치 나무가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을 뿐이다. 생명과 열매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열매 맺는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한동한 생명의 징후가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베드로와 도마의 경우 그리고 모든 과실수의 경우처럼 휴지기에 있는 참된 크리스천들은 결국 다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이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새뮤얼 존슨만큼 잘 보여준 인물도 없다. 크리스천이자 18세기 문학계의 거목인 존슨은 수십년간 게으름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죄'와 사투를 벌였다. 그의 일기장에서 찾은 몇몇의 발췌문을 소개한다. 1738년 오 주님 제가 게으름으로 허비한 시간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57년 오 하나님 제가 게으름을 벗고 남은 날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게으름과 죄로 허비한 시간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59년 게으름과 나태를 벗어 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61년 결심하고 또 결심했더니 이제는 결심하기가 두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64년 지난번 성례전에 참여한 뒤로 내 게으름은 극에 달했다. 이제부터 내 목적은 게으름을 극복하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65년 8시에 일어나려고 한다. 그렇게 해도 요즘 2시까지 누워 있는 것에 비하면 훨씬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다. 69년 어떤 결심도 하지 못할 상태이다. 그래도 아침 일찍 8시에 일어나려고 하고 일어나길 원한다. 점차 6시로 시간을 앞당기고 싶다. 1775년 매년 개선하고 고치기로 결심하고서 지키지 못했는데도 왜 다시 결심하려 하는가? 그것은 개선이 필요하고 절망은 죄이기 때문이다.(그는 8시에 일어나기로 다시 결심했다.) 81년(죽기 3년전. 첫 결심을 한지 43년 뒤) 절망하지 않으리라 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그는 게으름을 이기기 위해 8시 혹은 더 빨리 일어나기로 결심했다.)
우리만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존슨은 43년간 실패와 좌절을 반복했다. 당신과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실패는 존슨에게도 평생의 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실패는 하나님이 그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면에서 실패와 실망의 자리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만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인자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새뮤얼 존슨의 경우 수십년간 게으름과 싸움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명한 문호이자 윤리학자가 되었다. 스스로를 '지독히 비참한 인생'이요 '슬픈 이야기'로 불렀던 존슨은 시, 철학, 정치 평론, 사전학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서 전문성을 지닌 당대 최고의 문호였다. 특히 1977년에 그는 최초의 영어 사전을 출간하여 나중에 사전 존슨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내가 자주 말하듯이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온갖 것이 들어 있는 자루부대이다. 새뮤얼 존슨처럼 대단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평생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갔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심지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자기 의심에 시다릴는 시절에도 그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는 노력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빛을 세상에 환하게 발했다.
2장에서 스캇 목사님은 하나님이 디자인한 공동체의 능력과 우리가 왜 그 공동체를 사모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글들은 아래와 같다.
텔레비전에서 팝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가수 중 한명인 머라이어 캐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캐리는 수천마디의 찬사를 듣다가도 한마디의 비판이 날아오면 그 한마디가 수천마디의 찬사를 잠재워 버린다고 말했다. 나는 이 딜레마가 남 얘기 갔지 않다. 어떤가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칭찬과 인정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반면 모욕과 비판은 끈끈이처럼 들러 붙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사탄은 집요하게 우리에게 속삭이며 우리를 속이려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네가 용서받고 그분의 눈에 흠이 없으며 영원한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실까? 전혀 그렇지 않다. 네가 수치스럽고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뱀은 우리 마음을 향해 끊임없이 이런 거짓말을 속삭인다.
이것이 19세기의 목사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자신을 한번 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10번 봐야 한다고 말한 까달이가. 우리는 자꾸만 뱀의 입에서 나오는 비난과 속박의 음성에 대해서는 볼륨을 높이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와 자유의 음성에 대해서는 볼륨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매일 그리스도를 열번 보는 습관이 너무 중요하다. 태초부터 이어온 가면 쓰기, 자기방어, 숨기의 패턴에서 벗어나려면 머리와 가슴의 새로운 패턴들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수치의 말의 볼륨을 줄이고 영혼을 강하게 해 주는 말의 볼륨을 높이기 위해 우리 교회는 '축복'이라는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은'좋은 말'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다. 월요일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말을 건네며 교역자 모임을 시작한다. 그 목적은 서로를 공개적으로 격려하고 인정하고 축복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끊임없이 추구하신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말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당신 주변에서, 당신을 통해, 당신 자신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가 훨씬 더 큰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
베드로가 위선에 빠졌을 때 바울이 말해줬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진실을 말해 주었다. 이런 관계가 필요하다. 의사가 병을 이야기 할 때 감추지 않는 것처럼 영혼의 죄에 대해 친구들은 이야기 해야 한다.
목사로서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누구나 빠지기 쉬운 죄와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강한 어조의 설교를 많이 해야만 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내 양떼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내가 받은 소명이다. 이 소명을 받은 내게 죄를 지적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목사로서 또한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상대방의 죄를 지적해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험담 비방 분열적 행동 공격성 성적 타락 불륜 재정적으로 부적절한 행위 탐욕 자기애 같은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아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경우 하나님께서는 지적받은 사람을 회개로 이끌어 주셨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이 도리어 내 잘못을 지적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 회개해야 할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서로 냉랭해지거나 아예 관계가 끊어진 경우도 있었다.
한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던 아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아들아, 번민 중에 있는 너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단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 모세가 말을 더듬고 갑옷이 다윗에게 맞지 않고 마가가 바울에게 거부를 당하고 호세아의 아내가 매춘부였고 아모스가 선지가가 되기 위해 받은 유일한 훈련은 무화가 나무 가지치기 기술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예레미야는 의기소침했고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을 품었고 요나는 하나님에게서 도망쳤다. 아브라함은 거짓말로 인해 큰 곤욕을 치렀고 그의 자녀와 손자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들도 실패와 문제와 부족함과 연약함을 안고 살아간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뒤흔드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힘을 사용하시기 보다는 그분의 무적의 권능을 사용하신단다. 하나님이 그분의 이런 속성을 통해 네게 용기를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성경에 따르면 의심에 빠진 사람은 내 딸과 CS루이스, 프란시스 쉐퍼만이 아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이 물위를 걷고 물로 포도주로 바꾸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고 떡과 물고기 조금으로 수천명을 먹이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제자들도 해피엔딩에 의문을 품었다. 심지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미리 말씀 하셨는데도 실제로 부활이 일어나자 그들은 의심을 품었다. 그들도 그런 해피앤딩은 아이들이나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현실에 기반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부활의 기적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주신다. 예수님은 그분이 살아서 보좌에 앉아 계시며 그분의 해피앤딩 스토리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는 점을 공동체라는 배경 속에서 확인시켜 주신다. 기독교의 믿음은 실제로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실화인 동화다.
하버드 법대의 설립자 시몬 그린리프 박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믿게 되었다. 그린리프가 쓴 증거봅에 관한 논문은 지금까지도 많은 법학자들에게 역사적 주장의 진위를 증명하기 위한 경험적 증거 사용에 관한 최고의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때 기독교에 대해 반대자였던 그린리프는 학생들 압에서 '부활신화'를 조롱하곤 했다. 자신의 강력한 분석 기술로 주장을 증명해 보라는 도발에 그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연구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들을 어떤 식으로 교차 조사하든 '그들의 정직, 능력, 진실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신'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그녀가 첫 증인이 된 것은 상처와 죄로 얼룩진 과거를 넘어 마리아에게 소망을 주실 뿐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처럼 속할 곳을 절실히 찾는 모든 이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한 의도적이고 전락적인 행동이었다.
예수님은 세번씩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변함없이 사랑하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귀신들린 적이 있는 여인을 보내셨다. 주님의 용서와 은혜가 미칠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엔이라는 여성이 처음 방문했다. 헤로인 중독 치료를 받는 여인이었다.
아이와 함께 교회를 방문했는데 아이를 탁아방에 맡겼다. 그런데 그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싸움을 걸고 장난감을 여러개 망가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엔은 학부모들 앞에서 고래 고래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를 빠져 나갔다.
탁아방 교사가 편지를 보냈다.
엔씨에게
기억하시나요 교회에서 탁아방 교사로 섬기고 있는 제인입니다.
먼저 교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요. 망가진 장난감이요? 그것 말고도 장난감 천지에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썼어요. 지난 주일에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셔서 감사해요. 그것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저는 속으로 힘들면서도 마음을 늘 감추며 살아왔거든요. 솔직하신 모습이 정말 좋았어요. 그 모습을 보며 낳은 생각을 했어요. 모두가 솔직한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가 있을까요? 덕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와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라고 초대하셨다는 사실이 기억났어요.
꼭 다시 보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이번에는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인 드림
다음주에 엔은 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엔은 2년만에 교회 탁아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해피엔딩이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몇년뒤 그 교회의 현재 담임 목사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몇년간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던 앤에 다시 헤로인에 손을 대고 결국 헤로인 과다투여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엔의 이야기는 부활을 믿는 것이 단순히 지적인 활동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부활이 없다면 엔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아물너 소망이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분명 살아나셨다. 엔에게 이 사실은 비록 그녀가 파멸적인 중독 가운데서 잠이 들었지만 완벽히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님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은 부활하신 조물주의 영원하신 품에 온몸을 던지며 안전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 그녀의 심판 날은 미래에서 과거로 옮겨졋다.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자기 혐오스러운 순간에도 그녀는 온전한 사람을 받고 있었다. 예수님은 나쁜 사람들을 좋게 만들거나 좋은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3장 예수로 옷 입고 우리를 기다리는 세상 속으로
* 가난한 이웃은 하나님이 보내신 최고의 선물이다.
구제와 정의를 위한 하나님 백성들의 열정이 얼마나 강했든지 회의론자인 뉴욕 타임즈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빈곤과 질병 압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 소득의 10퍼센트를 자선을 위해 기부하는 크리스천들이 ....정말 많다. .... 무엇보다도 국내외에서 기아, 말라리아, 교도소내 강간, 산과 누공, 인신매매, 대량학살과 싸우는 최전선에 가보면 거기서 만날수 있는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크리스천들이다. 나는 특별히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감에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뉴욕 시의 칵케일 파티에서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가진 것이 적든지 많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구원의 은혜로, 자녀됨의 은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의 확신으로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부유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선행에서도 넘치도록 부요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모든것-예수님=0, 예수님+0+ 모든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신약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제2의 천성과 같았다.
*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창세기에서 타락하기 전에도 일은 있었다. 일은 이상적인 인간 삶의 일부요 하나님의 첫 낙원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다.
모든 성도의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 네 각하 저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나사 우주 센터의 한 청소부의 고백이다.
에던동산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끝이 났다. 그렇게 멋진 도시로 만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J R R 톨킨이 자신의 좌절감을 다루기 위해 짧은 이야기 한편을 썼다. 니글의 이파리이다.
시청 한 면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맡은 한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다. 니글은 예술가로서 그 벽화에 남은 삶을 모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결국 이파리 하나만 그린 채 아쉬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차창 박을 내다보던 그의 눈에 저 멀리 어렴풋하지만 익숙한 형상이 보였다. 그는 다급히 차장에게 달려가 열차를 즉시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열차 밖으로 뛰어나가 그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은 바로 그의 나무였다. 그가 생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움 모습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한복판에는 바로 그의 작품이 있었다.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그의 이파리가 당당하게 붙어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파리 하나도 영광스럽고 온전한 선물임을 깨달았다.
톨킨은 자신의 다른 작품에 대한 좌절감을 풀어보고자 니글의 이파리를 썼다. 그 작품은 그가 수년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써 왔지만 완성하지도 못하고 세상에 인정을 받지도 못할 것 같아 포기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작품은 중간게에 관한 이야기인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이다.
다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어질 때 자신의 일에 '그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을 때 그럴때마다 니글의 이파리를 읽기를 강권한다. 좌절감이 밀려 올 때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라. 겨우 이파리 한두 개처럼 보이는 '당신의 일이 하나님이 그분의 도성 한가운데 놓으실 나무의 꼭 필요한 일부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미래를 생각하라. 당신의 이파리는 만국을 치유 할 위대한 생명나무에 당당히 붙어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교회의 사역을 위해 헌금해야 할 최소 액수로 십일조를 정해 주었지만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론사이더에 따르면 미국 크리스천들의 평균 헌금액수는 겨우 수입의 2.4%이다 저자이자 맥시멈 제너로시티라는 단체의 창립자인 브라이언 클로스는 이런 상황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버거울 정도로 헌금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가장 중요한 재정적 우선순위지만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찌들고 빚에 허덕이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받아들이는 크리스천이 매우 드물다. 많은 교회가 성경의 명령에 따라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에 따라 헌금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문제의 일부로 보인다. 예산은 헌금의 기준이 아니라 소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
*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가장 깊고도 가장 오래가는 형태의 문화적 변화는 거의 대부분 '하향식으로 이루어 진다. 다시 말해, 세상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일은 대개 엘리트들의 일이다. 그것은 각자 자신의 사회적 영역에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 문지기들의 몫이다. 대중의 동요에서 변화의 운동력이 발생하더라도 엘리트들이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퍼뜨리기 전까지는 운동력은 확장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에서)
*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나병환자 마약 중독자 부랑자 빈민들에게 주님이 말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