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다윗의 회개 (삼하12장:1-14)

하늘 벗 나그네 2022. 10. 7. 06:50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냈다.
'보냈다'라는 단어는 삼하 11장에 다윗이 죄를 지을 때마다 사용된 단어다. 사람을 보내 밧세바를 불렀고, 사람을 보내 우리아를 불렀다. 편지를 보내 우리아를 죽이라 했다.
11장의 '보냈다'는 단어는 다윗이 이미 교만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 결과로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보냈다'라는 단어의 종지부는 하나님이 찍는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다. 하나님은 죄를 방관하지 않는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단 선지자는 신문에 연재되는 정치 풍자 만화와 같이 가난한 한 목동의 단 하나뿐인 암양을 갈취한 한 부자의 이야기를 다윗에게 들려주었다. 너무 소중해서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잠도 자는 자식과도 같은 그 양을 부자는 빼앗아 죽였고 그것으로 자기 손님을 대접했다.

다윗이 몹시 화가 났다. 왜? 다윗이 목동 출신이기 때문에 가난한 목동이 힘없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것이다. 다윗이 평결을 내렸다. 네배의 배상과 더불어 그 부자를 죽이라는 것이다.

네배의 배상은 그렇다 치고, 양 하나 빼았았다고 사람을 죽이라는 처벌은 너무하지 않은가?

목동과 부자의 이야기에 다윗이 분노했을 때 나단은 그 부자가 바로 다윗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다윗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사울의 왕권, 사울 가문의 모든 재산, 사울의 아내들,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이미 하나님이 다윗에게 다 주셨는데 뭘 더 탐낸단 말인가? 다윗이 갖고 싶은 것이 죄가 아닌 이상 하나님은 얼마든지 줄 마음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죄를 저지르다니....

다윗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주어졌다. 양 네마리처럼 네배의 배상이다. 네 아들이 죽어야 했다. 실제로 삼하 12장 이후는 네 아들의 죽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간음죄를 포함한 성적인 범죄가 다윗의 가문에 계속되었다. 눈에는 눈으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여진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다. 나단 선지자를 죽이로 또 다시 속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죄가 온 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용납했다. 하나님의 왕권과 다윗의 왕권이 충돌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했다.
그 결과 다윗의 범죄는 신하들이 알게 되었고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다윗의 만행은 오고오는 모든 세대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왕권과 다윗의 왕권이 충돌할 때 다윗은 비겁하게 숨지 않고 모든 잘못을 자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왕권과 선지자 나단의 왕권도 충돌하고 있다. 나단은 왕 앞에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단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생명을 부지하는 길 대신 죽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 한가지가 있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 율법은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
다윗은 가난한 목동의 양을 빼앗은 그 사람 이야기에 분노하여 사형을 언도했지만 하나님은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에 대하여 용서를 선언하셨다.

왜 용서가 선언되었을까? 다윗이 하나님께 잘한 것이 많아서?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무궁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다윗에게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과 대속의 은혜로 다윗은 용서 받았다. 그리고 우리도 용서 받았다.

본문은 두가지 측면에서 적용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정말 내 인생 가운데 왕이신가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로 반응해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요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