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믿음과 기도의 관계 (막9:17-29)

하늘 벗 나그네 2022. 11. 3. 23:45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귀신들린 아들은 말을 못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귀신이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렸고 이를 갈았으며 몸은 뻣뻣해졌다.

아들의 문제로 고민하던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가 귀신을 쫓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제자들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 제자들에게 요청했으나 제자들은 하지 못했다고 말씀 드렸고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예수님은 아이를 데려 오라고 했다.
아이 안에 있는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예수님이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속 에 던지고 물속에도 던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고쳐 달라고 하였다.

주님이 말씀 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아이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은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 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 아니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셨다. 아이가 건강하게 일어났다.

예수님이 집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따로 질문을 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나요?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쫒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쫒아낼 수가 없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제자들이 왜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고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은 믿음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고 말씀 하셨다. 언제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참아가며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기기를 기대해야 하느냐고 책망하셨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문제가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겨자씨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작아서 그 씨앗으로 정말 나무가 되기까지 자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작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그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능력이 나타났을 것이라 말씀 하셨다.

사실 씨앗은 크기 문제가 아니다. 씨앗이 커도 작은 나무로 자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씨앗이 작아도 큰 나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씨앗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고 그 씨앗이 생명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제자들의 믿음에 생명이 있다면 능력이 나타났을 텐데 그 생명력이 너무 미미하여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믿음이다. 생명력이 왕성한 믿음이다. 씨앗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믿음에 생명력이 얼마나 강하냐가 문제다.
언제까지 제자들의 믿음에 생명력이 생기기를 참고 기다려야 하느냐는, 안타까워하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느껴야 한다.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른 것도 없는 걸까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책망은 제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 책망을 들어야 한다. 언제까지 함께 있어야 하고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제 하나다. 예수님이 기대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때에 그 내용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에 죽으셨다. 우리의 죄의 댓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갚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어때야 할까? 생명력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생명력 있는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

최근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읽어가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 자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데 주님이 누군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안타까운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많은 경우에는 고치지 못할 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다.

아주 특이한 경우도 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다. 집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계신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지붕위로 친구를 올려 지붕을 뜯고 아래로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에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참 놀랍다. 중풍병자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병도 고쳐 주셨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무엇일까? 복잡하지 않다. 중풍병자의 삶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답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왔고 남의 지붕에 구멍을 냈다. 배상할 각오까지 한 것이다. 예수님에게 답이 있다는 확신과 확신에 근거한 행동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시각 장애인 바디메오라는 사람도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 하시고 치료해 주셨다.

바디메오가 예수님께 접근 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바디메오는 자신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께 가까이 가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일을 위해 바디메오는 소동을 피웠고 예수님의 관심을 받았으며 치료까지 받았다.

바디메오에게 있었던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님께 답이 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이 위해 그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사람만 더 살펴볼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성경에 등장한다. 이방인이었다.
딸이 귀신들렸다고 하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먹게 하는 것이 맞지 자녀의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 아닌데 이렇게 행동하셨다.

여인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여인은 낙심해서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았다. 낙심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주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믿으며 믿음의 고백을 했다.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상 아래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여도 귀신 들린 딸의 질병은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표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에게 내 인생의 해답이 있으니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 믿음은 예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내 인생의 문제는 모두 예수님 손에서 해결된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어떤 방법도 장애물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늘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육신으로 계신 주님 앞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이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주님도 오늘 본문에 말씀 하셨다. 29절 말씀이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정말 나의 소망 전부를 예수님께 두고 있나? 예수님의 응답을 듣기 까지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나? 그리스도인과 기도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신앙생활이 바르게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깊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않다. 기도로 소망을 주님께 두는데 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한다. 신앙생활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않다. 기도로 소망을 주님께 두는데 있다.

바리새인들이 도덕적으로는 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착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면서 살면서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문제를 모르며 살 수 있다.

예수님이 나의 온전한 소망이 되기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믿음이 바로 이 믿음이다.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는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